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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커버스토리 | 환자안전법 논란 03] ‘의료진 사과’와 법적 책임은 별개

[커버스토리 | 환자안전법 논란 03] ‘의료진 사과’와 법적 책임은 별개

2013.07.08 주간동아 이상일 울산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주간동아]


환자는 누구나 안전하게 진료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1999년 미국 의학한림원이 발간한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통해 많은 환자가 병원 안에서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 후 여러 나라에서 실태조사 등을 통해 환자 안전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담당기구를 설립하는 등 환자 안전을 높이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이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환자 안전에 대한 실증적인 조사를 한 적이 없어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우리나라 병원의 환자 안전 수준이 외국과 비슷하리라는 가정 하에 외국 연구결과를 우리나라 입원 건수에 적용해 예방 가능한 의료사고 사망자 수를 추정하면 연간 약 1만7000명 수준이다. 연간 자살 사망자보다 많고, 교통사고 사망자의 3배에 가까운 수치다.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그동안 정부와 의료계는 환자 안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10년 5월 한 대학병원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던 정종현 군이 항암제 투약 오류로 사망한 사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환자 안전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환자안전법’(일명 종현이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대형사고 줄이는 환자 안전보고 시스템

 

환자 안전에 관한 법률은 의료사고 예방을 위한 법률, 의료사고 사후처리를 위한 법률, 의료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 등 3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의료사고 예방을 위한 법률이란 환자의 안전 확보를 위해 의료 인력, 시설, 장비, 약품 등을 규제하는 법률을 뜻한다.

 

의료법, 약사법, 의료기기법, 혈액관리법이 이에 속한다. 의료사고 사후처리를 위한 법률은 이미 발생한 사고의 책임 규명 및 피해구제 등과 관련한 법률로 민법, 형법,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분쟁조정에 관한 법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의료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은 발생한 사고의 발견 및 조사를 통해, 동일한 또는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법률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범주의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 선진국은 의료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을 독립적으로 제정하거나 기존 법률에 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추세다.

 

2003년 덴마크가 처음 환자안전법을 제정했고, 미국은 2004년 뉴저지 주가 처음으로 관련법을 만든 뒤 2005년 연방법으로 ‘환자안전 및 질 향상 법’을 제정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스웨덴에도 유사한 법이 있다.

 

이러한 법률에서 주목할 것은 환자 안전보고 시스템이다. 일반적인 사고의 발생빈도를 분석해 도출한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대형사고 1건당 소형사고가 29건, 하마터면 일어날 뻔한 사고는 300건 발생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소형사고 또는 하마터면 일어날 뻔한 사고를 활발하게 보고하고 이를 분석해 시스템에 내재된 결함을 개선하면 대형사고 발생을 줄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환자 안전을 위해 특히 필요하다. 환자 안전에 관한 보고 시스템은 보고 의무에 따라 자율 보고와 의무 보고로 구분할 수 있는데, 소형사고 또는 하마터면 일어날 뻔한 사고에 대한 자율 보고를 활성화하려면 보고자에 대한 비밀보호, 보고 행위 및 개선 활동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자율 보고와 더불어 의무 보고에 관한 규정도 필요하다. 수술 부위가 뒤바뀐 경우처럼 의료진의 명백한 과실에 의한 의료사고의 보고를 의무화하고, 보고된 사고를 철저히 분석해 적절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 보고가 필요한 사고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나라가 미국의 국가의료질포럼이 제안하는 ‘의무보고 사건 목록(Serious Reportable Events)’을 참고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자료를 이용해 의무 보고 사항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국내 입법 사례로는 항공법상의 자율 보고와 의무 보고를 들 수 있다.

 

기구 설치, 운영 등 국가 책임 규정도


또 의료사고가 발생한 경우 환자 또는 가족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사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위로와 공감을 표시하는 ‘진실 말하기’를 장려할 필요가 있다. 해외 연구를 보면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을 시행한 후 의료과오 소송 건수 및 비용이 크게 감소하고, 문제해결 기간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인에게 이러한 ‘진실 말하기’에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려면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 또는 가족에 대한 위로와 공감 표명을 배상책임 증거에서 배제하는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 활성화를 위해 몇몇 국가는 의료인이 자신의 실수를 환자에게 공개하고 사과하는 것에 대해 불이익을 없애주는 법적 장치를 도입했다. 이러한 법의 예로는 198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처음 채택한 후 2009년 1월 현재 미국 36개 주에서 시행하는 ‘사과법(apology law)’이 있다.

 

이 법의 주된 내용은 의료진의 사과를 민사상 법적 책임에 대한 시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미국 10개 주에서는 진료 중 환자에게 위해가 발생한 경우, 이를 환자에게 알리는 것을 의무화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진실 말하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새롭게 제정할 환자안전법은 환자 안전보고 시스템을 총괄하고 의료기관의 환자 안전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기구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해야 한다. 또 우리나라의 환자 안전 수준에 대한 정기적인 실태 조사 및 개선 계획 수립, 의료기관의 환자 안전 개선 활동에 대한 기술적, 재정적 지원 등에 대한 국가 책임을 규정해야 한다.

 

이 법에는 환자 안전 개선 활동에 대한 의료기관, 의료인, 환자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사항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법 제정을 통해 의료인이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환자가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진료 환경이 빠른 시일 안에 조성되길 기대한다.

 


[출처: 주간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