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환자안전법 논란 02] 죽어도 “미안하다” 못하는 현실
2013.07.08 주간동아 이혜민 기자
[주간동아]
경북 한 병원에서 골절수술을 받은 환자가 수술 후 5일 만에 사망하자 유가족이 병원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왼쪽). 항암제 투약 오류로 사망한 정종현 군 사건 당시 시민들이 해당 병원 앞에서 의료사고 인정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A씨는 고등학생이던 2007년 2월 교통사고로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간단한 수술’이라는 설명을 듣고 수술한 지 6년째, 그는 여전히 병원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취 과정에서 생긴 사고로 지능이 유아 수준으로 떨어지고 팔다리까지 마비됐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1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해온 B씨는 2008년 11월 남편을 잃었다. B씨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고 약 복용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인은 폐렴이었다. 10월 말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남편을 보고 평소 B씨와 안면이 있던 레지던트는 “지난번 CT(컴퓨터 단층촬영)에서 이미 폐렴 소견이 나왔는데 왜 입원 치료를 안 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당시 CT 결과를 들려준 담당의는 “결핵약만 잘 먹으면 문제없다”고 했다.
A씨와 B씨는 사고 이후 현재까지 해당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의료진과의 다툼이 쉽지 않은 탓이다. 5~6년 전 일어난 불의의 사건과 끝없는 법적 공방은 두 가족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미국, 매년 4만~9만여 명 의료사고사
모든 사람은 병을 치료하려고 병원에 간다. 하지만 병원에서 병을 얻고, 나아가 목숨까지 잃는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1999년 미국 의학원이 펴낸 의료사고 조사 보고서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To err is human)’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년 환자 4만4000~9만8000명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의료과오로 목숨을 잃는다. ‘의료과오’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당연히 기울여야 할 주의의무를 게을리 해 사망, 상해, 치료지연 등을 일으킨 경우를 가리키는 말. 의사의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료기관에서 환자에게 손상이 일어난 경우 전체를 의미할 때는 ‘의료사고’라는 용어를 쓴다. ‘환자안전사고’도 같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연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이상일 울산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해외 각국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입원 환자의 약 9.2%가 의료사고를 겪고, 그중 약 7.4%가 사망에 이른다”며 “이 중 43.5%는 예방 가능한 사고”라고 밝혔다. 그가 이 수치를 ‘2011년 건강보험통계연보’의 입원 건수 597만 7578건에 대입해 계산한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약 4만695명이 의료사고로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사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 환자 수는 1만7702명이다. 2011년 한 해 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6316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한 의료 전문가는 “병원에서 환자가 당할 수 있는 사고는 가벼운 투약 부작용부터 사망까지 천차만별이다. 환자에게 실제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큰일이 날 뻔한 상황까지 포함하면 국민 대부분이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전문적인 의료 영역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일반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2011년 4월 사망한 배우 박주아 씨는 신우암 초기 판정을 받고 국내 유명 종합병원에서 로봇 보조 복강경 수술(일명 로봇수술)을 받던 도중 십이지장에 천공이 생겼다. 현재 해당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유가족들은 “박씨가 천공 때문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됐고, 이를 치료하려고 다시 무균 1인실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인공호흡기 연결 튜브가 빠지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전문가라 해도 사고를 피하기는 어렵다. 이상일 교수는 미국에서 의료사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일으킨 벳시 리먼 사건을 소개했다. 1994년 11월 유방암 치료를 받으려고 하버드대 의대 병원에 입원한 리먼은 적정 용량의 4배에 이르는 항암제를 투약받은 뒤 그해 12월 사망했다. 명백히 처방 오류에 의해 발생한 이 사고가 화제가 된 건 리먼이 미국 유력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의학전문기자였기 때문. 게다가 그를 담당한 의료진은 세계적인 암 권위자들이었다.
이후 미국 언론은 의료사고 관련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이런 사회의 관심은 1999년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보고서 발간으로 이어졌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2000년대 들어 해외 각국은 의료사고 줄이기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이미 발생한 사고를 면밀히 분석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 법적·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게 세계적 추세”라고 밝혔다. 실제로 영국, 미국, 덴마크 등 선진국은 의료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정보 공유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한마디만 했으면 용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5월 항암제 투약 오류 사고로 만 8세 정종현 군이 사망한 이른바 ‘종현이 사건’ 이후 관련 법 제정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안기종 대표는 “종현이가 세상을 떠난 뒤 확인해보니 그전에도 어린이 두 명이 항암제 교차 투여 사고로 목숨을 잃었더라. 종현이 어머니가 병원 측과 사고 책임을 놓고 공방을 벌이던 중에도 경기도에서 성인 림프종 환자 한 명이 같은 사고로 숨을 거뒀다”며 “처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모든 병원이 ‘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두 종류의 항암제를 한자리에 놓고 주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으면 추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종현이 어머니 김영희 씨 등과 함께 지난해 8월부터 “의료진이 병원 내 안전사고에 대해 알게 되면 이를 신속히 보고하고, 그 내용을 전체 병원 및 의료진이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환자안전법 제정 청원운동’에 앞장섰다. 4월까지 1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는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오제세 민주당 의원에게 전달한 상태다.
이에 대해 김소윤 연세대 의대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는 의료법·약사법 등에 의료사고 예방 규정을 두고,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는 형법·민법과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등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 법률은 없는 상태”라며 “의료기관 내 안전사고의 예방 및 처리, 재발 방지 등에 관한 사항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문제는 의료사고의 상당수가 의료진의 크고 작은 실수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발적으로 보고하게 하는 법률이 실효성을 갖겠느냐는 점. 실제로 A씨, B씨를 비롯한 많은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소송 과정에서 병원 및 의료진이 책임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심지어 의료기록까지 조작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이에 대해 최재욱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환자 안전보고 시스템이 성공하려면 의료진이 사고를 보고할 경우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보고체계를 구축한 덴마크의 경우 환자 위해사건을 보고한 의료인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 또 해당 의료인이 그 보고로 인해 형사절차나 징계절차에서 조사 또는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면책 조항도 두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환자 안전보고 및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목적이 보건의료인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환자 안전사고 예방과 교육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의료인들은 처벌에 대한 공포가 사고 발생 시 환자 및 보호자를 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입을 모은다. 섣불리 용서를 구하거나 그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가, 이후 소송 과정에서 책임을 지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반면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사고가 났을 때 의사가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다 용서했을 텐데 어떻게든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모습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안기종 대표는 “그들도 의사가 일부러 사고를 낸 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충격에 하소연도 하고 화도 내는 것 아니냐”며 “그럴 때 의사가 ‘법무팀하고 얘기하라’며 자리를 떠나버리면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사고 피해자 중에는 인터넷에 사고에 대한 글을 올리다 명예훼손으로 처벌 받거나 병원 앞에서 집회, 시위를 하다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한 이가 적지 않다”고 했다. “‘환자안전법’ 제정이 이런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이상일 교수는 효율적인 시스템 마련을 위해 항공 분야의 경험을 참고할 것을 제안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세계 항공사고 발생률은 1970년대 이후 크게 감소했고, 그 배경에 항공 안전보고 시스템이 있다. 이 교수의 설명이다.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경미한 항공안전장애를 발생시킨 경우를 제외하고 장애를 일으킨 사람이 발생일로부터 10일 이내에 적법한 보고를 한 경우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조항이 있다. 또 관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보고자의 동의가 없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보고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신원 보호를 위해 원보고서 서식 중 인적사항 기입 부분을 절취한 뒤 접수 후 10일 이내에 보고자에게 반송하는 시스템도 마련돼 있다.”
의료환경 개선의 첫걸음
이 교수는 “항공업계는 이런 보고 체계를 통해 항공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인을 사전에 발견하고 제거한다. 또 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전문가들이 그 내용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원인을 규명한 뒤 결과를 세계 항공업계에 알려 동일 또는 유사 사고 재발을 막는다”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인 만큼 의료사고에도 이런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사고 예방을 위한 시스템을 논의하면서 전문가들이 또 한 가지 관심을 두는 주제는 의료 인력 문제다. 권용진 서울시 북부병원장은 “민주노총 보건의료산업노조가 2011년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병원 노동자의 52.7%가 ‘인력 부족 때문에 의료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04년 조사에서는 대학병원 전공의 중 30%가 주당 120시간 이상 일하고, 51.4%가 100시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소개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종현이 사건’의 경우도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발생했다. 당시 해당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의료진의 잘못 인정을 촉구했던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을 검토해보니 과중한 업무에 집중력이 떨어진 전공의가 두 가지 항암제를 동시에 투여하면서 주사제를 혼동한 것으로 보였다”고 한 바 있다.
정치권은 최근 이런 다양한 논의를 모아 법 제정에 착수한 상태다. 4월 9일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한의사협회 등과 공동으로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입법토론회’를 연 오제세 의원은 “의료진이 병원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를 신속히 보고하는 제도와 이 보고 내용을 전체 병원과 의료진이 공유하고 해결 방안을 공동으로 찾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환자안전법의 방향”이라며 “이 법을 통해 환자 안전 확보는 물론 보건의료 인력의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의료 질을 향상시켜 국민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려 한다”고 밝혔다.
오 의원실 이강군 보좌관은 “현재 보건복지부, 대한의사협회, 병원협회와 환자단체 모두가 큰 틀에서 법 제정에 동의하는 만큼 8월 안에 법안을 마련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한 어린이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입법 운동이 우리나라 의료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법 제정으로 이어질지 많은 이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출처: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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