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환자안전법 제정 더이상 미룰 수 없다
2012.12.11 내일신문 이상일(서울의대 교수)
[내일신문] 이상일 울산의대 교수
2010년 5월 28일 한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던 어린이에게 정맥으로 투여해야 할 빈크리스틴이라는 항암제를 척수강 내로 잘못 투여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환자의 보호자가 빈크리스틴 투약 오류로 인한 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해, 보건복지부는 사고 발생 약 5개월 후인 10월 20일에야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등을 통해 빈크리스틴 투여 시 유의 사항 및 피해 예방법에 대한 공문을 발송했다. 2012년 10월 16일 이번에는 다른 병원에서 림프종으로 치료를 받던 41세 여성 환자가 척수강으로 잘못 투여된 빈크리스틴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고가 또 발생했다.
투약 오류로 인한 사망 사고가 발생한 두 병원 모두 대학병원으로, 환자를 안전하게 진료하고 있다는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의 인증을 받은 병원들이다. 이 두 사고는 우리나라의 환자안전 관리 체계의 허점을 보여주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환자단체의 요구에 떠밀려 인증기구와 함께 일부 병원의 환자안전 관리체계를 점검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러한 형식적인 조치가 환자안전 향상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환자안전에서 우리나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
세계보건기구는 2007년에 빈크리스틴 투약 오류에 대한 경보를 하면서 이러한 사고를 줄이기 위한 권고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이러한 권고에 맞는 방식으로 빈크리스틴을 투여하지 않고 있다. 빈크리스틴 투약 오류로 인한 사망 사고는 인재(人災)인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환자안전을 향상시키기 위하며, 보건당국과 의료계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환자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다. 정부와 의료계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환자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환자안전 향상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환자를 안전하게 진료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적 방안은 사고의 발생을 막기 위한 제도, 발생한 사고와 유사한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발생한 사고의 사후 처리에 대한 제도로 분류할 수 있다. 관련 법을 예를 들면 의료법, 약사법, 의료기기법, 혈액관리법 등이 첫 번째 범주에 속하며, 의료사고피해구제 및 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이 세 번째 범주에 속한다. 두 번째 범주인 환자안전 사고의 발생 확인과 원인 분석을 통한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관련된 제도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비슷한 사고의 재발을 줄이기 위해서는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기 이전에 경미한 사고 또는 하마터면 발생할 뻔했던 사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환자안전의 향상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보고체계의 운영이 필수적이며, 자율보고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보고자의 신원에 대해 비밀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또한 환자안전 개선을 위해 의료기관들 스스로 문제점을 분석한 자료에 대한 법적 보호 조치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보호 장치가 없으면 의료제공자들은 문제를 감추기에 급급하게 되고, 그로 인한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소위 '루즈-루즈 게임'이 되는 셈이다.
환자들의 무고한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길
그렇다고 표준에서 벗어난 의료제공자의 모든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의료제공자가 의도적으로 규칙을 위반했거나 중대 과실이 있었던 경우는 마땅히 그에 따른 법적인 책임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의료기관의 환자안전 수준에 대한 평가, 결과 공개, 재정적 보상과의 연계, 개선 활동에 대한 기술적 및 재정적 지원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환자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에 포함되어야 할 구체적 방안들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환자안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이것만이 환자들의 무고한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길이다.
[출처: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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