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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 너의 음주운전을 신고하라

[칼럼] 너의 음주운전을 신고하라
박형욱의 블루하우스

 

2013.05.10 청년의사 박형욱(단국의대 교수)

 

 

지난 4월 9일 국회에서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입법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많은 전문가들은 안전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해 보고체계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관련 정보를 알리고 공유하면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의무적 보고체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제도를 설계하면 실수로부터 배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응급의료법’ 제5조 1항(응급환자에 대한 신고의무)은 ‘누구든지 응급환자를 보면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얼핏 응급환자에 대한 신고의무를 규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선언적 규정이자 윤리적 규정이다. 왜냐하면 신고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처벌을 하는 벌칙 규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의무’라고 표현돼 있으나 ‘벌칙’이 마련돼 있지 않은 법률은 선언적 규정 혹은 윤리적 규정이다. 요컨대 응급의료법 제5조 1항은 자율적 신고체계를 규정한 것이다.

 

의무적 보고체계 도입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예로 항공안전 분야를 거론한다. 그러나 항공안전 분야의 의무적 보고체계는 본질적으로 ‘자율적 보고체계’다. 항공법 제49조의 3 제1항은 ‘항공안전 의무보고’라는 제목 아래 항공기사고, 항공기준사고 또는 항공안전장애를 발생시키거나 발생한 것을 알게 된 항공종사자 등 관계인은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그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처벌을 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항공법 제49조의3은 ‘항공안전 의무보고’라고 표현돼 있지만 실상은 ‘자율적 보고체계’를 규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민간항공 안전 보고체계에 관한 EU 지침(Directive 2003/42/EC) 제1조는 항공기 안전 보고의 유일한 목적은 사고를 예방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비난하거나 법적 책임을 부과하려는 데 있지 않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제8조는 ‘정보의 보호’라는 제목 아래 항공기 안전사고와 관련해 개인의 이름이나 주소는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항공안전 의무보고는 본질적으로 ‘자율적 보고체계’다.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환자안전에 대한 의무적 보고체계를 도입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사처벌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변호사도 있다. 그러나 의료만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생명과 관련된 행위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음주운전을 생각해 보라. 음주운전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범죄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음주운전을 한 당사자가 자신의 음주운전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을 한다는 법률을 도입할 수는 없다.

 

분명 음주운전은 범죄행위이고 경찰은 이를 적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제3자인 경찰이 음주운전을 적발하는 것과 당사자에게 음주운전을 보고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헌법 제12조 제2항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고하지 않는다고 처벌이 뒤따르는 ‘음주운전 의무보고’를 입법화한다면 이는 헌법 제12조 제2항이 규정한 진술거부권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리고 그러한 법률은 실효성도 없을 것이다. 누가 자신의 음주운전을 신고하겠는가.

 

환자안전 보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율적 보고체계여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자율적 보고체계는 보고를 하는 당사자를 철저히 보호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항공안전 보고체계가 그 예이다.

 

 

[출처: 청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