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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신문] 정종현군 사망 후 3년…이제야 걸음마 뗀 환자안전법

정종현군 사망 후 3년…이제야 걸음마 뗀 환자안전법
전문가들, 환자안전법 입법토론회서 도입 공감 방법면에선 이견

 

2013.04.10 청년의사 김진구 기자

 

▲ 이날 토론회에 앞서 故정종현군의 어머니 김영희씨와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환자안전법(일명 종현이법)' 제정을 위한 1만명의 서명을 오제세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에게 전달했다. 김진구 기자

 

 

故정종현군이 빈크리스틴 투약오류 사고로 사망한지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정군의 안타까운 죽음은 우리 사회에 ‘환자안전’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제2, 제3의 종현군 사례를 막자는 의미의 ‘환자안전법 제정을 위한 입법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회에 참석한 모든 전문가들은 환자안전법의 도입에 공감했다. 다만 법의 범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환자안전법, 무엇을 담아야 하나

 

참석자들에 따르면, 환자안전법의 기본 골격은 보고체계를 만들고 의료인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실수’를 보고하게 해 수집된 사례 분석 등을 통해 재발을 막자는 것이다.

 

울산의대 이상일 교수는 항공안전시스템의 보고체계를 예로 들었다. 항공안전시스템에서는 반드시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경미한 오류까지도 보고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놓고 어느 한 기체에서 발생한 실수를 전세계 항공사와 공유해 재발을 막고 있다. 이 교수는 “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보고체계만 있다면 종현군과 같은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연간 1만7,000명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적절한’ 보고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이 자발적으로 본인들의 실수를 보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돼야 한다. 따라서 “적절한 보상과 보고체계에 대한 비밀유지가 필수”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즉, 의료기관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보고행위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확실한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 최재욱 의료정책연구소장이 “국가 차원의 보고체계를 처음으로 구축한 덴마크의 환자안전법은 위해사건 보고 시 환자와 의료인을 익명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북부병원 권용진 원장 역시 “강제하는 방식으로 보고체계를 갖출 경우 의료기관에서는 사고 자체를 더욱 숨기려 할 것”이라고 의견을 같이했다.

 

환자들 또한 의료인의 보고행위에 대한 법적보호를 강조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 최성철 사무총장은 “정직하게 보고를 한 의사에게 주는 혜택이 없으면 대부분의 의료사고는 현재와 같이 합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며 “법적책임을 감면하는 것도 적극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인 자발적 보고체계 실효성 있을까”

 

결국 환자안전법의 핵심은 의료인 및 의료기관의 자발적 보고체계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는 것. 그러나 자발적 보고체계 구축 가능 여부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렸다.

 

우선 법 제정보다는 보고에 대한 인식개선이 먼저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국의료질향상학회 김영인 이사는 “병원 내에서조차 소통이 안 되는데 법으로 규정한다고 소통이 될지 회의적”이라며 “국민과 의료계가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법이 제정될 경우 그 결과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은 인식부터 개선돼야 한다. 문화가 성숙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법을 도입할 경우 활성화보다는 오히려 음성화될 우려가 있다”며 “법안이 도입된다면 보고체계와 함께 의료기관에 대한 지원체계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의대 김소윤 교수(의료법윤리학과)는 “보고체계가 갖춰진 나라에서도 보고체계를 활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전체 의료사고의 1~2%밖에 보고되지 않는다”며 “자발적인 보고체계도 좋지만 결국 의료기관에서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법을 만든다고 현장이 바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기존의 법체계 하에서도 적정 수준의 환자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직접 사고원인을 조사하는 방법을 통해 자료를 쌓을 수 있다”며 “의료분쟁조정중재원 등에 접수된 사건들을 분석하고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오류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환자안전법을 만들지 말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무작정 만들어지길 기다리기보다는 기존에 쌓여있는 자료라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환자안전법만 제정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계와 병원계에서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 실효성에 물음표를 던졌다. 대한의사협회 이재호 의무이사는 “의료법, 약사법, 의료분쟁조정법 등에 산재된 환자안전관련 규정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지 논의한 다음 본격적으로 (환자안전법 제정) 논의가 이뤄지면 더 좋을 것”이라며 “현실과 동떨어진 법을 제정할 경우 수용성이 낮아서 작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한병원협회 이왕준 정책이사는 “어떻게 현장에 적용하고 전국으로 확대할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당장 인력문제나 페널티, 책임 등의 문제로 확산될 경우 의도치 않게 법이 표류하거나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환자안전을 목적으로 하는 점에서 인증제도와 내용이 일부 겹친다”며 “분쟁조정제도나 인증제도를 보완하면서 환자안전법을 시행해 시너지를 내도록 하는 게 너무 많은 내용을 담아 표류하게 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복지부 “일단 환자안전기본법부터라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자 보건복지부는 “기본법부터라도 입법하자”고 제안했다. 일단 첫걸음을 뗀 뒤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는 걸 감안해 살을 붙여 나가자는 것이다.

 

복지부 곽순헌 의료기관정책과장은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지만 무엇을 담을지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며 ”무거운 조항은 따로 논의하더라도 보고체계를 갖추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기본적인 내용만 담아 기본법 형식으로 가는 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인증제와의 중복문제, 인력, 근무여건, 인센티브, 구체적 보고내용 등의 문제는 다른 법에 명시돼 있는 만큼 추후 논의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이상일 교수도 “명칭을 환자안전법이라고 하니 범위가 모호해진다. 보고와 재발방지에 초점을 맞춰 최소한의 내용만 포함시켜 도입해야 한다”며 “보고가 잘 안 될 거라고 단정하는 건 섣부른 단정”이라고 거들었다.

 

환자단체 최성철 사무총장도 “내 아이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체벌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이가 철이 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다”며 “인식개선을 전제로 점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따르기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수로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며 뜻을 같이 했다.

 

권용진 원장 역시 “시작에 의의를 둬야지 벌써부터 완벽한 결과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 청년의사]